여행 만렙
여행에도 등급이 있다.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비즈니스 이코노미로 나눠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타지에서 만난 여행자들에게서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되는 질문이 있다. ‘여행 얼마나 하셨어요?’
이 질문은 단순히 체류기간을 묻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여행기간이 나보다 짧을 경우에는 아~~ 나보다 길 경우에는 오~~ 가 나올 확률이 크다.
아~~~
여행 한지 3개월 정도 되는 친구들 앞에선 인생 대선배라도 된 양 군다. 상대가 나보다 한 살이라도 어릴 경우에는 더 심하다. 인도를 갔는데, 바라나시를 안 갔다고? 거기를 안 가면 인도 갔다고 말하면 안 되지.라고 시작되는 문장 뒤에 온갖 고난과 역경은 자신에게만 일어나듯 에피소드를 대 방출한다. 여행 꼰대다. 그건 네 생각이고, 얼굴에 대놓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피곤한 귀는 표정이 없고, 입은 씁쓸한 미소를 띠고 있다. 가랑이가 헐렁한 바지를 입고 머리는 하늘 높이 똥머리를 하고 손으로 밥을 먹고 맨발로 거리를 걸어야지만 진정한 여행인가?
여행자 사이에선 화장이라도 하면 꼭 화장했어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보면 모른가? 눈썹도 그렸고 입술도 빨갛잖아. 화장하고 싶으니깐 했겠지. 한국에서 생얼 하고 나가면 아파 보여. 왜 화장 안 했어?라고 묻는 것이 여기서는 반대다. 화장했네.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피곤하다.
오~~~
여행이 잘하고 못하고 가 있나? 없지만, 있는 것만 같다. 여기를 안 갔는데, 이걸 안 봤는데, 나는 거기서 이걸 안 했는데, 이거 안 먹어 봤는데, 이 사람은 이걸 했네. 내가 놓친 것들을 생각하느라 현재를 또 놓친다. 인생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티브이, 책, 대중매체에서 그려놓은 진정한 여행자라는 표본을 향해 달린다. 분명 내가 그린 여행자의 모습은 아니다. 모두들 서울대 김태희를 꿈꾸며 달린다는 어느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피라미드 상단을 향해 거기가 아니면 인생의 낙오인 것처럼.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고 불리는 곳 중 하나인 다합
다합에 얼마나 있었어요? 한 달, 두 달, 여섯 달, 일 년 삼 년 계급 훈장처럼 붙는다. 오래 있는 게 뭐가 중요하다고 단 하루를 살아도 자신이 어떻게 느끼냐에 따라 다른 것을,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이건 모두 나였다가가 너인 이야기
[여행지에서 쓴 글, 지금 읽어보니 나 역시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하게 됐다.
아무 상관없으면 이런 생각을 수면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행지에서도 경쟁과 비교가 있다는 사실에 몹시 괴로웠던 날 쓴 글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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