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이 나갔다.
이제 잘 곳, 갈 곳이 없다. 자초한 일이지만 타인에 의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먹먹함마저 주위를 맴돈다. 막상 집이 나가니 없었던 애정이 샘솟기 시작한다. 벽돌 벽면 가득 채운 책장, 천장에서 내려오는 조명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놔둔 것이 없었다. 사물들은 각자 자리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이내 서운한 감정을 내비친다. 아끼지 않았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입주할 때는 수도꼭지의 물기, 거울에 맺힌 물방울 하나까지 세심히 닦고 또 닦았다. 그러나 그 마음과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배수구에는 머리카락이 뱀 또랑을 틀고 있고, 욕실 바닥은 미끌미끌 누런 이끼가, 분리수거통은 언제 꽉 찼는지 며칠 전에 버렸던 우유갑이 쾌쾌한 냄새를 풍기며 자신이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랬다. 익숙함이 나른함을 넘어 게으름까지 오기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찌그러진 우유갑을 보니 내 삶도 그런것 같아 엿새전 집을 내놨다. 충동적으로 내놓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삼일 만에 집을 계약하자는 사람이 나타나자 아끼는 사탕을 입에도 못 대보고 땅에 떨어뜨린 심정이다. 이제는 별 수 없다. 나는 15일 뒤면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 계약금을 받았고, 싸인도 했고, 부동산에서 하라는 대로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잘하는 편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착한 사람인 나는 입꼬리가 전형적으로 웃는 상이다. 주변에서 나의 미소를 보고 항상 기분이 좋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말을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듣고 자라서 지금은 그 칭찬이 좋지도 싫지도 않는 지경까지 왔다. 언제부터 나는 항상 미소 짓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알고 있다. 미소는 어긋나 있다는 것을.
오른쪽 입술을 더 실룩 거려야 입꼬리의 수평이 맞는다. 의식하지 않으면 미소는 가로소움으로 바뀌어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을 수 없다. 의식이 있을 때만 비로소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나를 위한 미소는 분명 아니었다. 상대방을 위한 착한 미소. 오른쪽 입꼬리 근육의 미세한 떨림 없이는 이 사회에서 살 수 없다. 그래서일까? 이 곳을 떠나려 한다. 오롯이 나를 위한 미소를 짓기 위해
집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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