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시를 읽는 이유
눈을 떴다. 잠들기 전 풍경 그대로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7시 언저리에 일어난다. 화장실로 간다. 치약은 아래에서부터 짜 칫솔에 묻힌다. 새로 산 치약의 알갱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머리만 감는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나와 캡슐 커피 머신에 룽고 캡슐을 넣는다. 어제 퇴근길에 산 토마토 모짜렐라 샐러드를 꺼내 드레싱 없이 커피와 함께 아침을 먹는다. 화장대에 앉는다. 얼굴 전체 미스트를 분사하고 흡수되도록 손으로 꾹꾹 누른다.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을 바르고, 메이컵 베이스를 바르고,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다 지워낼 걸 바르고 또 바른다. 마지막으로 붉은 입술을 바르고 어제와 같은 롱치마를 꺼내 입고, 긴팔티를 입었다. 한여름에
출근길 지하철 안 표정 없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같은 얼굴을 한다. 퇴근을 바라는 출근길
퇴근하는 지하철 안. 아침까지만 해도 이 순간을 기다렸건만 표정이 없는 건 매한가지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내일 아침에 먹을 샐러드와 오늘 저녁에 먹을 빵을 산다. 0724를 눌러 10시간 전에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간다. 지워내고 다시 바르는 시간. 샤워를 하고, 물기를 닦아내고 좋아하는 바디로션을 바른다. 얼굴에도 수분크림을 듬뿍 바르고, 소시지 빵을 한입 베어 문다. 그리곤 핸드폰을 터치해 깨웠다. 메시지 8개. 작년에 다녔던 치과, 파마했던 헤어숍, 전에 살던 동네 헤어숍, 경주에서 갔던 네일숍, 쿠키가 맛있는 제과점, 허리 통증으로 갔던 정형외과, 회사 근처 한의원, 방금 전에 들렸던 빵집, 다 한번 이상 가보았던 곳에서 온 메시지였다. 귀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렇게 많은 메시지를 받은 날이 처음이다. 답장을 하고 싶어도 반기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쓸쓸해졌다.
밤은 길고, 긴 시간을 메우려고 노트북을 켰다. 시시껄렁한 영화나 김치 싸대기 같은 아침드라마를 볼 요량으로. 인터넷 네이버 검색사이트는 다양한 정보들이 클릭해달라며 깜빡깜빡 댔다. 애초에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깜빡 잊고 흐름에 휩쓸린다. 실시간 검색어를 쑥 훑어내고, 수많은 정보들 중 하나를 클릭했다. 잡동사니 가게처럼 영화 미술 책 정보를 모아둔 블로그. 커서를 내렸다.
김광규
나
살펴보면 나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는 아들의 아버지고
나는 형의 동생이고
나는 동생의 형이고
나는 아내의 남편이고
나는 누이의 오빠고
나는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이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이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지금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눈으로 읽고, 심지어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누구지? 답은 없고 질문만 허공에 맴도는 밤은 깊고, 깊었다.
눈을 떴다. 7시 언저리. 치약을 아래부터 쭉 짠다. 머리를 감고, 어제 산 샐러드와 룽고 커피로 아침을 먹고, 얼굴을 단장한다.
어제와 같은 롱치마와 긴팔을 입는다. 출근길 지하철 안 표정 없는 사람 틈에 내가 있다. 표정이 생긴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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